
[키드신→카이신]
그해의 겨울 또한, 우리에겐 뜨거웠다
겨울이 싫었다. 땅을 덮고, 하늘을 덮고, 마음까지 덮는 눈도 싫고. 살갗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도 싫고. 생명력 없는 풀숲도, 추위와 맞서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도 싫었다. 모든 것이, 어떤 계절과 대조를 이루어서.
겨울이 싫었다.
창밖이 환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눈이 내린 것 같다. 아침부터 최악. 작게 중얼거린 신이치가 새하얀 풍경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커튼을 닫았다.
방 안의 온도는 언제나 일정. 따뜻함을 넘어 약간 더울 정도로. 하루 종일 돌아가는 보일러에 집은 항상 후끈후끈했다. 덕분에 작년이었다면 이맘때엔 꺼낼 일조차 없었던 얇고 짧은 옷들을 입고 있었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 해의 끝자락임에도 불구하고 제 세상은 아직도 더웠다. 바깥의 삶과 단절된 채 저만의 계절을 꿋꿋하게 고집했다. 최대한 집 밖으로 나가는 횟수를 줄였고, 나간다고 해도 거의 실내에 머물렀다. 또한 제 몸을 훑고 지나가는 찬 공기가 싫어서 옷차림은 거의 살이 안 보일 정도로 꽁꽁 싸매기 일쑤였다.
계단을 밟고 한 칸 한 칸 발을 내딛자, 이마에서부터 땀이 주륵 흘러 볼을 타고 내려간다. 더워. 계단 끝에 다다르며 신이치는 얼굴의 땀을 닦아냈다.
1층으로 내려와 제일 먼저 한 것은 바깥을 향해 뚫린 창들을 모조리 가리는 일이었다. 하얀 세상을 부정하듯 짙은 색의 커튼으로 창을 뒤덮고. 혹시나 어디선가 찬바람이 새어들어오지 않을까 싶은 걱정에 이곳저곳을 확인하는 작업도 필수였다. 그리고 끝으로 난방기구가 잘 돌아가나까지 확인한 후에야,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 메뉴는 언제나 그렇듯 간단한 토스트. 요즘은 이것조차 챙겨 먹는 일이 드물었다. 시원한 우유를 컵에 따르고 그에 맞춰 띵-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르는 토스트 빵 위에 몇 가지 재료를 올린다.
토스트를 먹기 전 우유로 목을 축인 신이치가 부엌에 들어오는 길에 챙긴 아침신문을 펼쳐 들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문 토스트의 맛이 입안에 제대로 퍼지기도 전에 신문 여기저기에 쓰인 말들이 신이치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사상 최고의 폭설. 뚝 떨어진 기온. 작년보다 일찍 개최되는 크고 작은 겨울축제들. 최대한 그것들을 보지 않으려 애쓰지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신문을 접어두고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컵에 담겼던 새하얀 우유가 금세 사라지며 머그컵의 검은 바닥을 드러낸다. 순식간에 나타난 컵의 바닥에 신이치가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안녕, 명탐정.’
이런 순간에서조차, 저는 그를 떠올렸다. 새하얀 우유는 그의 망토를, 그 망토가 사라지고 난 후에 드러난 검은 바닥은 까만 밤하늘을. 일상에서 스치듯 지나칠 수 있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조차, 저는 그를 떠올렸다.
‘오랜만인 것 같지 않아?’
언제부터 그를 향해, 괴도키드를 향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도주 직전의 키드를 옥상에서 맞닥뜨렸고, 손을 내밀어 보석을 돌려주길 요청했다. 한껏 여유 넘치는 웃음을 걸고 저를 마주한 키드는 보름달을 등지며 제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이고 뭐고 보석이나 내놔.’
‘이런, 매정하네-’
포물선을 그리며 제 손에 안착한 보석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고.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싶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가만히 키드를 노려봤다. 적당히 부는 바람에 녀석의 망토가 너풀거리며 유려한 물결을 만들어냈다.
‘한동안 보기 힘들 거야.’
천천히 입을 연 키드가 제게 건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별다른 대답 없이 묵묵히 그를 응시하자 키드는 느긋하게 발을 내디뎌 제게 다가왔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를 상황에서도 흐르는 여유로움. 몇 년간 제가 봐온 키드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뚜벅뚜벅. 흰 구두가 만들어낸 규칙적인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렸다. 손을 조금 뻗어도 닿을 만큼, 제게 가까이 다가온 키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말을 이었다.
‘사정이 생겨서 말이야.’
‘…….’
‘한- 1년. 정도.’
‘그런 걸 나한테 말해주는 이유가 뭐야.’
‘갑자기 사라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서.’
‘별로. 관심 없어.’
‘글쎄. 어떨까.’
거짓말.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린 음성이 눈앞으로 훅 끼쳐왔다. 피할 틈도 없이 뒷머리가 잡힌 동시에 얕게 맞물리는 입술. 짧은 순간이었지만 감촉만은 확실했다.
명탐정, 날 좋아하면서. 보드라운 속삭임에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내가, 녀석을? 저조차도 확실히 알 수 없었던 감정을, 그는 일찌감치 인식하고 있었던 걸까. 푸르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찼다. 그 안에는 제 모습이 담겨있어서,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모노클을 잡았다.
‘이건, 다음 기회에.’
제 손을 잡아 내리는 행동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부드러웠다. 또다시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또한 그러했다. 쪽. 부끄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울린 소리를 뒤로하며 키드는 난간으로 걸어갔다.
‘다음 여름에 봐.’
갑작스레 찾아온 감기 같았다. 그것도 독하기로 소문난 여름 감기. 혼자선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한순간에 꺼내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운 밤의 한가운데에 몸을 던졌다. 멀어지는 행글라이더가 점차 작아져가고, 결국 제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약한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극복할 수 있다 생각했고, 그럴 능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제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 괴도 같은 건, 그저 가끔씩 요란하게 제 일상에 끼어드는 그런 존재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저는 그러지 못했다. 희미하게 남은 흔적이라도 잡고 있으려는 듯. 키드와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그 계절에, 그가 제게 약속했던 한 계절에. 끝없이 집착했다.
말 그대로 제 세상은, 엉망이었다.
몇 입 안 베어 문 토스트를 접시에 내려둔 신이치가 신문을 구겨 대충 바닥에 버렸다. 어차피 결국 치우게 될 건 저였지만. 일단 지금은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밖에 나가야 했다. 왜 하필 이런 날씨인 건지 원망스러워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동안 외출을 미루고 미뤘던 제 탓이니까.
얼마 만의 외출인 건지는 딱히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 깊은 곳에 넣어뒀던 두꺼운 옷들을 꺼내서 한 겹, 두 겹, 껴입을 뿐이었다.
목도리에 장갑까지 갖춘 후에야 비로소 외출을 할 용기가 조금, 아주 조금 피어오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막아낼 큰 우산도 들고, 점퍼의 모자도 뒤집어쓴다. 코까지 올라온 목도리에 숨이 답답했지만 최대한 무시하려 애썼다.
굳게 닫혔었던 현관 문이 열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겨울 특유의 차가운 향과 바람이 신이치를 강타했다. 서둘러 우산을 펴고 눈을 헤치며 발걸음을 빨리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찬 공기에 미처 가리지 못한 맨살이 시리다.
목적지는 새로 생긴 여행용품 가게. 전에 한 번 외출했을 때 스쳐 지나가듯 본 곳이었는데, 집에 돌아와서부터 자기 전까지- 계속해서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충동적으로 결제해버린 비행기 표. 1년 내내 덥고 습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3주 정도의 기간을 잡은 여행은, 이번 주 주말. 그러니까 이틀 후면 떠날 예정이었다. 계획 없이 시작된 여행은 왠지 모를 설렘을 안겨줬다.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큰 내부를 가진 가게는 여행 분위기가 물씬 풍기도록 꾸며져 있었다. 신이치는 포근한 웃음을 건네는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접은 우산을 내려둔 후 깔끔하게 정리된 진열대 앞으로 다가갔다. 들고 다니기에 편한 작은 가방. 세면도구를 담을 수 있는 팩. 각양각색의 밴드들. 하나씩 바구니에 담을수록 기대가 점차 커지는 것 같다. 얼마 만의 웃음인 건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천천히 가게 안을 둘러보던 신이치가 의외의 물건에 시선이 잡혔다. 웬 향초? 꽤 많은 종류의 향초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있다. 특이한 향을 가진 것도 있어서 신이치는 잠시 목적을 잊고 향초 아래에 적힌 설명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습기 제거. 방향. 두통 완화. 많은 종류답게 각각의 효능도 조금씩은 다 달랐다. 하나 사볼까. 여행을 떠나기 전날, 써보는 것도 좋을 지도.
제일 무난해 보이는 향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오늘도 한 번 써볼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단단한 촉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비록, 바로 사라졌지만.
“저기- 제가 먼저…”
황당한 사람. 분명 제가 먼저 잡은 게 확실한데,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낚아채듯 향초를 집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려 했지만 바구니에 물건을 집어넣느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곧 표정을 푼 신이치가 다른 향초에 눈길을 돌렸다.
“그거 말고. 저게 낫지 않을까?”
“…네?”
“머리를 맑게 해주고 피로 회복에 도움을 주는- 완전 딱인 것 같지 않아?”
명탐정한테는.
목소리를, 숨기고 있었나. 속삭이듯 내뱉은 마지막 말만이 확실히 달랐다. 급하게 고개를 든 신이치 앞에 파란 향초가 내밀어졌다. 당신, 아니. 너. 시야를 가린 향초를 밀어 치우자 남자가 깊게 눌러 썼던 모자를 벗었다.
“무엇보다 명탐정 눈동자랑 같은 색이고 말이야. 그리고 푸른색이니 그 계절과도 잘 어울리지 않겠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맨 얼굴을 드러내고 제게 웃음 짓는 남자를- 키드를, 멍하니 바라볼 뿐. 옅은 숨이 파르르 떨리며 새어 나왔다. 커진 눈동자는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힘이 풀려 바구니가 손을 빠져나가고, 곧 퍼질 요란한 소리를 예상했지만 그걸 잡아내는 키드의 손이 더 빨랐다.
“안녕, 명탐정.”
“…….”
“오랜만인 것 같지 않아?”
“…….”
“아니, 처음이려나.”
“…….”
“난 쿠로바 카이토.”
우연이었다. 정말 우연.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몇 번이고 찾아가고 싶었던 마음을 꾸욱 눌러 담으며 참고 또 참았다. 신이치의 동네까지 왔다가 발걸음을 돌린 적도 많았다.
그날 한 입맞춤은 저 또한 예상치 못하게 한 것이라서, 만난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무서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탐정은 제게 관심이 있는 게 맞았지만. 쉽게 인정할 그가 아니었으니.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나눴던 그 입맞춤이 흐려질까 두려워 날이 추워질수록 더욱 소중히 마음속에 품었다. 키드일에 관해 좋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1년이란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세간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때가 올 때까지 그 소중한 기억만을 안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겨울은 너무나도 혹독했다. 매서운 추위는 추억을 흐릿하게 만들려 애를 썼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그를 원했고 바스러져가는 기억에 처절할 정도로 매달렸다. 그러던 중에 꺼내든 해결책은, 떠나는 것이었다. 그날과 같은 무더위 속에 파묻혀있다 보면 조금이나마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당당했던 주제에, 명탐정이 알면 한심하다고 고개를 저을지도 몰랐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떠나기 일주일 전, 저와 같은 목적일지도 모를 그를 만났다. 아니, 수년간 그를 봐온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앞의 남자는,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명탐정.”
“…….”
“신이치.”
자연스레 불리는 제 이름에 신이치가 손끝을 움찔했다. 제 장갑을 벗기고 깍지를 끼는 손이 뜨거웠다. 실내로 들어오느라 목도리는 턱 끝으로 내린 지 오래였다. 코끝에 잡은 손만큼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잘못하면 주저앉을 것만 같아서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나랑 가자. 여행.”
잠시 일상 같은 거 다 접어두고. 이 추운 계절이 지나 무더운 여름이 돌아올 때까지 같이 떠나있자.
담담하게 전해지는 말들은 저를 감싸 안기에 충분했다. 내뱉어지는 말도, 동의의 끄덕임도 없었지만 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카이토는 알고 있을 터였다.
여름의 끝에서 한 해의 끝까지. 그리고 앞으로 돌아올 나날들까지. 맞닿은 숨결이 저희가 언젠가 처음으로 나누었던 그날의 무더위처럼 뜨거워서, 추위 같은 건 모조리 잊은 채. 바깥에 휘날리는 눈보라 같은 건 모조리 잊은 채. 눈을 감으며 옷자락을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