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신] 장맛비
[오늘 오랜만에 만날래? 할 얘기가 있어. (발신자:♥)]
오랜만에 쿠로바가 문자를 보내왔다. 웬일이지. 요즘엔 서로 바쁜 것도 있고, 사소한 일로 몇 번 싸우다 보니 며칠간 쿠로바와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면 늘 먼저 쿠로바가 내게 애교를 떨며 연락을 해오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표현에 서투른 편이다 보니 싸울 때면 늘 쿠로바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와 주는 게, 어찌 보면 쿠로바가 나에 대한 배려를 베푸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번에는 연락을 하지 않던 그 기간이 좀 오래 가긴 했지만, 여느 때처럼 쿠로바가 내게 연락을 먼저 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놀랍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만날지 답장하기도 전에 쿠로바가 장소와 시간을 이어서 문자로 보내왔다. 이에 나는 ‘알았어’라는 세 글자로 문자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꼭 이런 날엔 이렇게 만나서 쿠로바가 내 화를 풀어주고 데이트를 했는데, 오늘도 보나 마나 데이트를 하겠지, 뭐. 오늘은 어디로 가려나. 여름이니까 수영장에 가나? 근데 요즘 장마철이라 비 올지도 모를 텐데. 아니다, 실내 수영장에 가나 보다. 내 수영복이 어디에 있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장롱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나기는 거기도 하고, 데이트도 오랜만인 거니까 오늘따라 왠지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것 같다. 애인을 만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가슴이 벅찼다.
*
나는 약속 장소인 베이커 역 앞에서 쿠로바를 기다렸다. 물론 수영복도 챙겼고 말이다. 설령 쿠로바가 수영장에 가지 않겠다고 해도 내가 우겨서 끌고 갈 것이다. 수영복은 두 벌이나 챙겨왔으니, 쿠로바가 수영복이 없다면 내 수영복을 빌려주면 되지, 뭐.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나온 감이 있었지만, 우리 둘 다 늘 약속 시각보다 일찍 나오는 편이니 쿠로바가 곧 올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나 햇볕이 뜨거우면 어쩌나 했지만, 날씨가 흐려 더운 여름날인데도 꽤 선선했기에 밖에서 쿠로바를 기다리는 게 부담되지 않았다. 하기야 아무리 더워도 쿠로바를 기다리는 건데 당연히 기다려야지.
그러다 약속 시각이 되기 10분쯤 전이 되자, 쿠로바가 왔다. 나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위로 쭉 뻗어 좌우로 휘저었다. 그리고 쿠로바가 날 발견하고는 시선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보통 내가 먼저 나와 있을 때는 쿠로바가 날 발견하고 나면 미소를 한가득 지으면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바로 뛰어와 나를 있는 힘껏 안았다. 하지만 오늘은 나를 발견하고도 태연하게 걸어왔다. 표정 변화도 없는 데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아 순간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어디 몸이라도 불편한 걸까.
쿠로바가 내 눈앞에 섰다. 하지만 쿠로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던 듯싶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잘… 지냈어? 오늘은 어디 갈 거야? 난 수영장 가고 싶은데.”
“쿠도… 미안해.”
“어…?”
“우린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갖 무거운 물건들을 내 심장 위에 얹어놓은 느낌이었다. 갑작스레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은 게, 숨 쉬는 것조차 벅찰 정도로 그 무게를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요즘 너무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순간적인 불쾌감에 충동적으로 말한 건 아닐까. 아니야, 내가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어. 오랜만에 애인을 만나서, 신나서 제대로 못 들은 걸 거야. 그래서 난 쿠로바에게 되물었다.
“뭐… 라고…? 뭐라고 한 거야…?”
“헤어지자고.”
쿠로바의 그 말이 다시 한번 내 가슴을 때렸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이라도 피 나고 멍든 가슴을 위로해주었으면 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래. 탐정은 절대 울지 않으니까… 이런 순간마저 눈물이 나오지 않는 나를 원망했다. 나 자신이 초췌해 보였다. 왜 나는 나를 스스로 위로할 줄을 모르는 거야. 왜 더 아프게 하는 거야.
“도, 도대체 왜…? 그동안 연락 안 해서 화난 거야? 아니면 내가 뭘 잘못한 게 더 있어? 뭔데, 뭐야… 왜 갑자기…”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나 때문이야.”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라고…?”
이게 무슨 소리인 건지 영 알 수가 없다. 내 잘못이라면 고치도록 노력해보겠는데. 나는 쿠로바에게 서운했던 적, 화났던 적이 하나도 없는데. 역으로 쿠로바가 내게 서운했다거나 화났던 적이 많은 거면 또 몰라도. 내 서툰 성격 때문에 나조차도 느낄 정도로 여러 번 쿠로바가 서운할 법했는데도 늘 날 이해해주고 챙겨줬던 사람이라, 표현은 잘 하지 않아도 늘 고마웠던 사람이다. 그리고 쿠로바 또한 이 마음을 내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 거야. 난 너라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한데. 여기서 얼마나 더 변해도 난 꾸준히 사랑해줄 자신이 있는데.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혹시 ‘그 일’ 때문인 건가…? 쿠로바는 가끔가다 남몰래 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다. 본인 말로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일이라고만 했고, 쿠로바가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도 잘 알지 못한다. 쿠로바도 ‘지이쨩과 같은 사람 이외엔 이 일에 관한 일은 전혀 모르니까 알고 싶어도 참으라’고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알게 되면 나까지 위험해진다고 하길래 나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쿠로바와 함께 그 위험을 감수해내고 싶었지만, 어쩐지 예전의 내가 생각나서 알아내려다 관뒀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되었고 말이다. 나는 혹시나 해서, 정말 혹시나 해서 쿠로바에게 물어보았다.
“쿠로바, 혹시 그럼 ‘그 일’ 때문인 거야…?”
“… 그래, 맞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길래, 나까지 포기하겠다는 거야…?”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가 나랑 가까이하면 네가 너무 위험해지거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난 여전히 너를 사랑해. 너와 떨어져 있어도 난 널 잊지 않을 거야.”
“내가 괜찮다잖아! 난 내가 위험해져도 상관없어. 너만… 있으면…”
쿠로바는 나를 품에 안았다. 잠시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던 심장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쿠로바의 그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이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황스럽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도대체 ‘그 일’이란 게 뭐길래 나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데도 헤어지자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쿠로바는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나를 안은 채 내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미안하고 사랑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느껴졌다. 이 말을,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지만, 오늘 듣는 건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다. 내게 여전히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쿠로바가 미웠다.
그리고선 쿠로바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언제나처럼 나만 보면 환하게 웃던 그 미소로 날 바라보았다. 나도 쿠로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쿠로바의 눈, 코, 입, 자그마한 잡티까지 하나하나 모조리 다 기억해둬야지. 앞으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동안 했던 수많은 것들이 너와 함께했기에 의미가 있었다. 나 혼자 하기엔, 다른 사람과 하기엔,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보면 나도 참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그럼… 나 이제 갈게. 안녕.”
그 말을 끝으로 쿠로바는 안고 있던 날 놓고 발걸음을 떼었다. 날 놓고 떠나가버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손마저 잡을 틈 없이,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틈 없이 정말로 그렇게 떠나가버렸다.
내 품속에 남아있던 온기를 되새겼다. 어쩐지 이 이별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휴대전화로 전화만 걸면 여기로 달려올 것 같았고, 또다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 같았지만,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가슴이 아려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베이커역 계단 한구석에 주저앉아버렸다. 내 품속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으니 쿠로바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갑작스레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여름 장맛비답게 시원하게 퍼부었다. 안 돼, 안 되는데. 내 품에 남아있던 쿠로바의 온기가, 냄새가 사라진단 말이야. 나는 내 가슴에 남아있던 쿠로바의 온기와 냄새를 위해 나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안 돼, 안 돼… 가지 마, 사라지지 마… 오늘은 날씨가 꽤 맑길래 비가 안 오나 싶었는데, 오히려 퍼붓는다. 어쩐지 울지 못하는 나 대신 하늘이 울어주는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