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루신-Green Light
비가 멎었다. 줄곧 지하철 창을 따라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아쉬워 손가락 끝으로 비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그려내 보지만, 하늘은 흐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는다. 초여름의 달뜬 한숨이 열꽃처럼 창 위로 엷게 번진다. 덜컹거리는 열차 안, 무기력한 얼굴들 사이에는 그 또래 사내아이들에게 날 법한 땀 냄새 대신 비 내음을 잔뜩 묻힌 소년이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길 위에 펼쳐든 우산 위로 물방울이 하나 둘 묻어나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걷힐 생각을 하지 않더니 결국 다시 비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같이 젖어서 눅눅하다던가, 비린내가 난다던가 하는 것이 아닌 둘러싼 모든 것 가진 저마다의 내음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특별히 후각이 예민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눈동자에 분명하게 각인되는 색채처럼, 비 오는 날에는 시각적인 것보다도 후각이 더욱 또렷하게 그 색을 감지하게 된다. 비에 젖은 운동화 끝이 먼지와 뒤섞여 조금 더럽혀졌다. 하지만 또래 특유의 무심함으로 소년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정도와 걸음의 속도는 반비례하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소년은 걸음이 더디게 더 되었을 무렵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에 결국은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 채 적당한 건물 밑에 잠시 발을 들여놓았다. 갑작스러운 비에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 또는 우산을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 그리고 혹은 자신처럼 건물 아래에 몸을 숨긴 사람.
그 옆얼굴에 시선을 두었을 때 공간이 기묘하게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짜증이 난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 멍하게 비 오는 광경을 바로 보고 선, 자신보다 한 뼘 하고도 반 뼘 정도 더 큰 사람. 뒤집어쓴 후드 정수리가 조금 젖어있었다. 하얀 반팔 후드티. 마른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은 사람은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학생인가? 무례라는 것도 잊은 채 미끄러져 내린 시선의 끝에 잡힌 것은 하얀 비닐봉지로, 그 안에 든 것은 고추냉이 땅콩과 같은 주전부리 몇 가지와 맥주 세 캔이었다. 아, 역시 성인이구나. 쓸데없이 감탄을 하며 조금 눈을 감자 곁에서 풍겨오는 향은, 향수로 떡칠을 한 같은 반 여학생에게서도 맡기 힘든 비누향이다. 대낮은 아니지만 평일 오후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서 비누향이라. 그 괴리감에 소년의 입술 끝에는 웃음이 서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여전히 그 사람은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그곳에 시간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박제되기라도 한 것처럼. 만약 스치는 바람에 눈이 깜빡이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마네킹인 줄 알았을 것이다. 우산이 없는 거겠지, 하늘을 보아하니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비가 오는 거리 위에 다시 펼친 우산은 소년 자신 하나를 담고서도 한 사람을 더 들일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조금 망설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곧 여전히 멍한 시선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의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 들었다. 그제야 그 사람의 눈동자 위에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옅은 아마색의 머리, 그 흔한 점 하나 없는 하얗고 뽀얀 얼굴, 선명한 색을 가진 눈동자 위에 자신의 당황한 얼굴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우산, 없으시죠?"
다시 생각해보아도 평소와 같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용기로 건넨 말, 멍한 얼굴 위로 생기 어린 표정이 조금씩 번지며 웃던 그 순간, 그 미소와 동시에 감정이라는 파장이 빗방울 떨어진 연못처럼 아주 넓은 원을 그리며 소리도 없이 퍼져나갔다. 남자였다. 사실 처음에는 성별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비 오는 길에 어깨가 부딪힐 법한 거리에서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몇 마디를 나누었을 때 목을 긁고 나온 목소리는 소년다운 목소리였다. 어색한 기류가 감도는 거리 위의 적막을 메운 소음을 빗소리로 기억한다. 내리는 비가 빚어낸 소리가 조금씩 버겁게 느껴질 즈음에 남자의 걸음의 멎었다. 손가락으로 오피스텔 5층 언저리를 가리키며 여기가 집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친철한..."
어라,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요. 그렇게 말하며 습관인 건지 또다시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유월 초엽의 내음이 묻어났다. 적당히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했지만 매미가 울지 않는, 봄꽃이 완전히 지지 않았지만 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살갗을 태울 듯 뜨거운 7,8월의 태양과는 달리 적당히 따뜻한 유월의 햇볕. 봄과 여름의 경계에 선 아직은 설익은 '풋풋함'과 같은 것이었다.
"쿠도 신이치입니다."
어쩐지 얼굴이 따끔거렸다. 이 반응은 얼굴이 빨개질 때에만 느껴지는 것이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을 때 들려온 웃음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선명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네. '친절한' 신이치군."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 울림이 좋았다. 귀까지 빨개진 것을 그 탓으로 돌리며 ‘조심해서 들어가요’ 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인 뒤 도망치듯 급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익지 않은 감각을 적당한 온도에 맞추기에는, 소년의 계절은 초여름으로 접어들어가는 세상의 계절과는 달리 그 감정을 전부 태워버릴 듯 뜨거운 한여름이었다. 이름만이라도 물어볼걸.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으며 신이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자꾸만 뇌리에 남는, 마음을 노곤하게 만드는 그 웃는 얼굴에 스치는 듯 지나갔던 만남이 아쉬워졌다. 다음날에도 5교시가 끝날 즈음부터 내리던 비는 하교할 시간이 되어서도 계속해 세상을 적셨다. 장마철이 아니더라도 우산은 꼭 가지고 다니는 편이라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께 전화를 하거나 새로 우산을 살 필요가 없었다. 물빛으로 물든 거리 위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 좋았다. 지금껏 자신을 눌러오던 어떤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비는 꼭 그 무게를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신이치는 잠시 데자뷰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딱 그만큼 같은 모습으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 날의 남자를 발견했다. 만약 그 남자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더라면 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망설임도 없이 다가가서 그의 머리 위에 다시 우산을 바르게 놓았다. 그러자 멍했던 시선에 가득 들어찬 자신을 깨닫고 남자는 어제의 그날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라, 또 만났네요."
이번에도 남자의 손에는 우산 같은 건 들려있지 않았다. 그 대신 익숙한 물건들이 익숙한 편의점 비닐봉투 안에 들어있었다. 반투명의 비닐봉지 사이로 엿보이는 물건들에 두었던 시선을 옮겨 남자를 바라보자 머쓱한 듯 웃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천진난만했다. 그 얼굴에 마주 보고 웃을 뻔 한 것을 겨우 날숨으로 감추었다.
"안녕하세요."
뒤늦은 인사를 건네고서 쑥스러운 마음에 걸음을 옮기면서 자연스레 우산 안에 들어온 남자의 온기는 전에도 느꼈지만 유월의 그것처럼 적당히 뜨거웠지만 의외로 부딪힌 손등은 비닐봉지 안에 담긴 캔맥주처럼 차가웠다. 오늘도 그날처럼 빗소리만이 정적을 가만히 뒤흔들어 놓았다, 자신의 보폭에 맞추려 걸음을 빨리하는 남자를 알아챘을 때, 신이치는 그도 모르게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느린 걸음이 익숙해질 무렵, 교복을 끌어당기는 손이 느껴졌다.
"바빠요?"
그렇게 물어오면서 시선을 맞춰왔다. 아뇨. 짧은 대답에 남자는 또다시 웃음으로 답을 해왔다. 그러면 잠깐 앉았다 갈래요?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돌려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비닐봉지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을 때, 옆에서 칙 하고 캔맥주 따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남자는 입꼬리를 더욱 올리며 웃었다. 마시고 싶어요?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어대자 남자는 머쓱한 듯 혼자 맥주를 마셨다. 곤색의 얇은 가디건과 베이지색 면바지가 썩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라며 상념에 잠겼는데 그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자신의 눈앞에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대는 남자가 귀여워 보이는 바람에 신이치는 깜짝 놀라 뒤로 떨어져 앉았다, 그 모습에 남자는 또다시 소리 없는 웃음을 내보였다.
"○○고등학교?"
교복에 수놓아진 마크를 본 모양이다. 순간 무슨 말인가 곱씹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비가 내리는 공원은 꽤나 운치가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좋다고 생각될 만큼 남자와 비 내리는 풍경은 제법 어울렸다.
"공부 잘하나 보네요."
그 말에 겸손을 떨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신이치를 보면서 남자는 몰래 웃음 지었다. 좋은 고등학교에 갈 실력이 충분했지만 그렇게 얻은 장학금이라도 사립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워 포기했을 정도로 신이치의 집안 사정은 어려운 편이였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 턱이 없었다. 또다시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르자 신이치가 그 침묵을 깨트렸다.
"공원 좋아하세요?"
다리를 교차시킨 채 턱을 괴고서 정자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내뱉은 말이었다. 그 물음에 남자가 턱에서 손을 떼고서는 신이치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올곧은 반응에 어쩔 줄을 몰라 신이치는 시선을 자신의 발치에 둔 채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잠시 뒤 남자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그 시선을 남자의 얼굴에 둘 수 있었다.
"아니요."
사람이 많아 시끄러워 질색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당연히 좋아한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적지 않게 놀란 신이치가 자신을 바라보자 남자는 역시나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역시 습관이구나.
"비 오는 날의 카페는 아무나 좋아할 수 있지만 귀찮게 우산을 쓰고 펴고 다녀야 하는 궂은 날씨에 젖어서 눅눅한 냄새가 나는 공원 정자를 좋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그래서 비에 젖을 필요가 없는 카페가 더 좋아요. 신이치군은 어때요?"
느닷없이 날아온 질문에 신이치는 네?라고 얼빠진 소리를 대답으로 들려주었다. 아, 그러니까 저는... 횡설수설하다가 문득 그의 손이 차가웠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데일 듯 뜨거운 자신의 손. 이 지독한 열기를, 비가 모든 부담을 씻어 내려준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대답한다면 과연 당신을 나를 뭐라 생각할까? 조그마한 게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허세라 생각할까. 하지만 이제 비가 오는 날, 익숙한 모퉁이를 돌아 그 건물 아래 비를 피하고 있을 그쪽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비가 오는 날이 조금 더 기다려진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겠지. 많은 생각의 끝에 씁쓸한 웃음이 신이치의 입에 걸렸다.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 신이치에게 대답을 추궁하는 대신, 남자가 입을 연 순간, 남자는 첫날 보다 더 큰 보폭으로 자신의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후루야 레이. 내 이름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