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색신-바다의 이야기
강렬한 햇살은 화살처럼 쏘듯 내리쬐다가도 어딘가에 닿기만 하면 모래알처럼 힘없이 바스라졌다. 곱게 부서진 조각들은 하나하나 눈이 아리도록 빛을 내며 산산히 흩어졌다. 백사장 위에 얹힌 햇살과 함께 바스러지는 모래알갱이들은 햇볕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눈이 아리도록 반짝였다. 새하얀 풍경이 밀려오는 푸른 소리에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하얗고 푸른 조화가 어우러진 해변가는 밀려오는 파도소리 말고는 반짝이는 고요함에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함을 파묻은 백사장은 햇살 조각들의 온도를 품고 따스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푸르름이 스며든 눈부신 하얀빛에 조용히 묻혀있던 신이치의 귓가에 굵직한 남성의 두 목소리가 엇갈려 들려왔다,
“대체 왜 따라온거지, 아카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대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아무로 군?”
스며들어가는 두 빛을 완전히 갈라놓을 사나운 기운에 신이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하던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아-,다시금 한숨이 새어나왔다. 대체 어째서 둘은 붙기만 하면 조용하던 빛깔에 파동을 일으켜 흐리게 만들어 놓는 것일까.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닐텐데? 먼저 질문 한 건 나니까, 당신이 먼저 대답하시지?”
아스라이 일렁이는 푸른빛을 보며 눈을 감은 신이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걸까. 하지만 이 모두 자신이 자처한 일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어쩌다 이렇게까지 꼬여버렸는지 자신을 한탄할 수 밖에,
사건의 시작은 아주 간단했다.
“아가,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것 같은데.”
짙게 내려앉은 초록빛의 눈동자의 시선을 마주한 푸른빛의 시선에 의아함이 담겼다. 자신만을 담고 잇는 초록빛의 눈동자가 저런 빛을 띤다는 것은 저 말 뒤에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겠죠?”
낮게 내려앉은 초록빛의 시선이 맑은 푸른빛의 시선과 실처럼 엮여들어갔다. 가볍게 닿았던 시선은 깊게 얽혀가며 서로의 색으로 엮여가기 시작했다. 맑은 푸른빛과 진한 초록빛이 만나 바다같은 청록빛으로 서서히 번져갔다. 청록빛의 시선에서 먼저 끊어진 색은 푸른 빛이었다. 시선이 끊어짐을 느낀 아카이는 천천히 아이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끈질김에 아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포기라는 것을 모를까. 꼭 늑대같은 집요함을 가진 사내에게 아이는 두손을 들며 항복의 의미로 그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카이 씨가 하고 싶으신 말은 뭐죠?”
아이의 푸른 눈동자는 늘 가벼워보여도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얼음으로 조각한 듯 아름다운 눈이었지만 그 눈이 보내는 시선은 그 조각보다도 더욱 날카로웠다. 그 조각은 늘 정확히 진실만을 꿰뚫어 부서트렸다. 한치의 거짓도 아이의 앞에서는 있을 수 없다. 새삼 느껴지는 그 사실에 그는 답지않게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굵은 선이 그려내는 미소에서 나는 향은 옅게 가라앉은 담배의 냄새였다. 그 희미한 향에 아이는 조금 더 그와 시선을 가까이 햇다. 청록빛이 진하게 물들어갔다. 찻잎이 우러나듯 진하게 물드는 시선을 마주하던 아카이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바다라도 같이 가지 않겠어.”
그런 어조를 띠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은 명백히 같이 가자는 청유의 뜻을 품고 있었다. 아이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이내 아이의 얇은 선은 가늘게 휘어졌다.
“좋아요, 같이 가요, 아카이 씨.”
이번에 깜빡인 것은 푸른 빛이 아닌 초록빛의 눈이었다. 잠시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듯 천천히 깜빡이던 초록빛의 눈동자는 이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굵은 선이 가느다란 선을 따라 가볍게 휘어졌다.
“같이 더 갈 사람이 있으면 좋겠군. 누구 한 사람 정도,불러줄 수 있을까,아가.”
“그래요,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청회색빛의 눈동자가 조용히 반짝였다, 어째서 주변의 사람들은 어째서 이렇게 차분한 눈동자를 가진걸까, 신이치는 잠시 생각했다. 낮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은 그 속에 들은 것을 읽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용히 침식되어 있는 눈빛은, 사람을 읽지 못하게 하고,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눈동자는, 읽을 수 없음에도 그 사람에게 더욱 다가가가고 싶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알 수 없어서 다가가기 싫다는 느낌이 아닌, 알 수 없으니 더 알고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잠시 그 호수 같은 눈을 바라보던 아이는 말을 꺼냈다,
“아무로 씨.”
그의 눈빛처럼 조용히 내려앉은 목소리가 천천히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그 울림이 귓가에 닿자 조용한 시선이 살짝 일렁였다, 그 눈부신 파편 하나하나가 아이를 담고 있었다. 자신을 담은 거울 같은 눈동자를 천천히 응시하던 아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여름은, 작년 여름보다 더 더울 것 같죠?”
말을 꺼내기 위해 겨우 내뱉은 말은 그가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잠시 스쳐가는 초록빛의 환영에 아이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런 아이의 행동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던 아무로는 아이와 같이 작은 어조로 아이에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겠지.”
호수에 다시금 파문이 일었다.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무언가가 꿈틀, 작게, 아주 작게. 뒤흔들렸다. 그 호수를 마주한 푸른 얼음조각에도 무언가가 꿈틀, 작게, 아주 작게, 요동쳤다.
“그래서, 신이치가 하고 싶은 말은 뭐지?”
도르륵, 푸른빛의 구슬이 굴러갔다. 어딘지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화는 묘하게 익숙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째서, 아이는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은 자신과 완전 다른 대화를 하고 있었다. 신이치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어,그 얇은 선 틈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다라도, 같이 가지 않을래요.”
작게 흐릿한 말끝은 청유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 말에 청회색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반짝, 이다 흐릿, 해지는 등불처럼 깜박이던 눈동자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다시금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가 검은 얼굴에 드리워졌다,
“좋아, 같이 가자, 신이치 군.”
분명히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사람과 하는 대화인데, 어쩐지 너무나 익숙했다.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뛰어 넘어서, 지금 시간이, 장소가 어디쯤인지, 누구와 하는 대화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이 맞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 묘한 기시감에 이번에는 아이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결국 아이가 보인 것은 그와 똑같은 미소였다.
사람이 더 있으면 좋을 거라는 말에 문득 생각난 아무로를 데려온 것은 확실히 자신의 실수였다고 신이치는 인정했다. 솔직히 그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데. 보기만 하면 으르릉대고 싸우지 않는가. 그래서 아무로에게 같이 바다가자고 하자마자 바로 신이치는 후회했엇다. 차라리 어린이 탐정단이나 란을 부를걸. 그래도 이미 뱉어버린 마당에 어떻게 줍겠어, 설마 나를 봐서라도 대놓고 싸우지는 않겠지, 싶었는데........신이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저 철없는 어른들은 이제 아예 바다에 뛰어들어서 물장구를 치며 서로를 적셔버리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저정도되면 물장구가 아니라 회오리 수준인 것 같아서 신이치는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러다 저 사람들 정말로 큰일나겠네. 중얼거리면서 아이는 두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말려놓았다.
“두 분 다,제발 그만 하세요!여기까지 오셔서 싸우시면 어떡해요?”
아이의 새된 목소리에 네 개의 눈동자들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깜빡이는 두 눈동자가 어딘지 점점 타오르고 있었다. 첨벙-옅은 금빛을 띠던 머리통이 아이의 눈동자만큼 푸른 바다속으로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그 위를 굵은 손가락이 짓누르고 있엇다. 아이가 황당하다는 듯 바다와 같은 빛의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그 손의 주인은 씨익 미소짓고 있었다.
“감히 아가와 같이 온 벌이다, 아무로 군. 역시, 단 둘이 오자고 했어야 할 걸 그랬던 것 같군.”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아카이 씨!”
이내 다시 참방하는 물소리와 함께 금빛의 머리칼이 다시 올라왔다. 이미 흠뻑젖은 머리칼의 주인은 복수하듯 검은 머리카락을 쥐고선 바다속으로 쳐넣어버렸다. 그만하세요, 두 분 다!!새된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금 공중을 울리며 햇살 속으로 바스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