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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신-하얀 파도

햇볕이 자글자글하게 일어 오르는 검은색 아스팔트를 거침없이 달리던 자동차가 어느덧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매끄럽던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잘은 자갈들이 깔려있고 커브가 심한 길의 연속이었지만 자동차는 전과 마찬가지로 무리 없이 부드럽게 주행했다. 하늘을 뒤덮은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잘게 쪼개져 내려온 햇살이 얼굴을 두드렸다. 나뭇가지에 앉아 제 짝을 찾는데 열중하는 매미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근처에 계곡이 있는 것인지, 시원한 물소리가 재잘재잘 속삭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배경 삼고는 길을 따라 핸들을 이리저리 꺾으며 운전하던 아카이가 슬쩍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거칠어진 길에 행여 아이가 깨지는 않았을까, 하던 그의 걱정과는 달리 신이치는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여전히 잠에 취해있는 중이었다. 순간, 꽤 큰 자갈을 밟은 것인지 차체가 덜컹거렸다. 그 탓일까, 신이치가 자고 있던 자세를 바꾸며 뒤척였다.

 

“…으, 음…….”

 

웅얼거리며 등받이에 얼굴을 묻는 아이의 모습에, 아카이의 입에 절로 미소가 베어 나왔다. 차체를 따라 흔들거리는 머리칼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아카이가 한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촉감이 그대로 손끝으로 전해졌다.

 

“으음……. 아카이 씨….”

 

미세한 인기척을 느낀 탓일까, 눈꺼풀 속에 가려져 있던 맑은 벽안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칼을 만지고 있던 손을 살짝 떼어내며 건네는 아카이의 말 속에는 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깨웠나 보군.”

“으응, 아니에요.”

 

신이치가 눈을 비비더니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을 쭉 펴던 그는 팔을 내리며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뭐, 일어난 김에 바깥 구경이나 하면서 가죠.”

 

그리고- 깍지를 낀 손을 머리 뒤에 갖다 댄 신이치가 슬쩍 내비게이션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는 스쳐 지나가는 수풀에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말투에서는 즐거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으니까.”

 

우거진 숲으로 가려져 있던 시야가 확 트이며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시원하게 뻗은 내리막길 저 너머로,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반짝이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하얀 파도

by. Lriel

 

 

 

 

 

“우리 바다나 갈까요.”

 

어젯밤은 상현달보다 조금 더 부풀어 오른 달이 푸른빛을 쏟아 내는 밤이었다. 창가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시린 빛을 등지며 아이가 문득 건넨 말은 바다에 가자- 라는 것이었다. 무덥고 습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연한 여름에 발을 들이지 않은 초여름. 바닷가로 놀러 가기에는 이른 시기였을뿐더러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화두가 된 주제였기 때문에 아카이는 그저 두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거절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었기에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럴까.”

 

여행은 그렇게 약속되었다. 더군다나 마음을 먹었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며, 그 즉시 빨빨거리면서 짐을 챙기기 시작하는 신이치의 재빠른 행동력 탓에 예상치 못하게 일정은 당장 다음 날로 잡혀버렸다. 어차피 가까운 바닷가에 가서 구경만 하다 올 셈이니 챙길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신이치의 지휘대로 이리저리 집 안을 가로지르는 아카이의 몸짓에는 평소의 냉철한 이미지는 어디로 갔는지 허둥지둥,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지만,

 

“아카이 씨! 이거, 이것도 챙겨야죠!”

 

아이가 좋다면야. 잠시의 당황스러움 따위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들떠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아카이의 얼굴에도 자연스레 작은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 지금쯤이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운 모래가 알알이 늘어져 있는 해변을 유유자적 거닐고 있어야 했을 텐데.

 

“…정말이지.”

“…물에 젖은 생쥐 꼴이군.”

 

잔뜩 물을 먹은 옷이 온몸에 착 감기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주르륵, 팔이며 다리에 맺혀있던 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이 앉아 있는 모래사변은 이미 물에 젖어 검게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앞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허망하게 쳐다보던 아카이와 신이치가 동시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이의 말 그대로, 현재 둘의 모습은 물에 폴싹 젖은 생쥐 꼴이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금방 마르겠, 죠…….”

 

애써 밝은 목소리로 옷을 가리키며 말을 꺼낸 신이치였지만 자신을 무심히 쳐다보는 녹안에 점점 목소리는 작아지다 끝부분에 가서는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회피하는 아이의 모습에 아카이는 그저 고개를 좌우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건… 그러니까, 약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바닷가 근처 주차장에 매끄럽게 주차를 마치고 차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그들을 반긴 것은 창공을 비행하고 있는 갈매기의 경쾌한 울음소리였다. 꽤 긴 시간을 차에서 쭈그려 자고 있느라 몸이 찌뿌둥한 상태였던 신이치는 힘껏 기지개를 켜며 시원한 바다 공기를 폐부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하얀 거품을 뿜어내는 푸른 파도를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을 때였다.

 

“꺄악-!!”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아카이와 신이치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비명이 커지기 시작하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로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주고받는 눈빛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둘은 일제히 사람들이 몰려드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살인 사건이었다.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찾은 소동의 원인은 물에 등을 내놓은 채 떠내려오는 시신 한 구였다. 그저 보기에는 사고인지 사건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평소의, 귀신같이 단서를 찾아내는 능력으로 이것이 살인 사건이라고 단정 지은 둘은 곧바로 경찰을 불렀다. 그리고 차근차근, 단서를 조합해 나가던 둘은 경찰이 온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금방 사건을 해결해 버리고 말았다. 용의자로 꼽혔던 네 명 중,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연기를 펼치고 있던 범인은 무서울 정도로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둘의 압박감에 못 이겨, 급기야는 바다로 뛰어들기까지 했다. 도망갈 셈이었는지 목숨을 버릴 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가만히 앉아 두고 볼 신이치가 아니었다.

 

“신이치 군-!!”

 

주변 경찰들이 말릴 새도 없이 범인을 따라 바다로 뛰어든 신이치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끌고 지면으로 나오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거센 발버둥에 자칫하면 신이치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 오자 재빨리 아카이가 그 뒤를 이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덕에 아무런 피해 상황 없이 사건이 종결되었지만 아카이와 신이치는 물에 잔뜩 젖어버리는 상황을 막을 수 없었다.

 

 

 

잠시 회상을 하던 아카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옆을 흘깃 쳐다보자 옷에서 물기를 쭉 짜내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여분 옷도 없는데- 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난감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사건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은 여전하군.”

“하하…….”

 

멋쩍은 듯 웃는 아이의 모습에 아카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매번 자신의 몸은 생각하지 않고 뛰어나가는 아이다 보니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카이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져올 때까지 신이치는 자신의 옷을 털어내기에 바빴다.

 

“신이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신이치의 시야로 보송보송한 수건이 들어왔다. 아! 작게 감탄사를 터뜨리며 얼른 수건을 받는 아이의 모습에 아카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혹시 몰라 챙겨두었던 수건이 이리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었지만, 어쨌든 과거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팔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카이가 가져왔던 다른 수건으로 신이치의 머리를 털어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잠깐 멈칫하며 남자를 바라보던 신이치의 눈에 그의 몸에도 숱하게 맺힌 물방울들이 보였다.

 

“아카이 씨도 많이 젖었는데… 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건 이 이후에 해도 괜찮아. 네가 감기에 걸리기라도 해서는 안 되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묵묵히 머리의 물기를 세심하게 닦는 그의 모습에 신이치가 손을 바닥으로 내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에게 맞닿는 손길은 행여나 자신이 아파하진 않을까 하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있었지만, 남자의 눈에는 오로지 자신만이 꽉 차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카이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던 신이치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신이치가 운을 떼자 아카이가 아이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반짝이는 바다를 눈에 담던 신이치가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도 바다였네요."

 

추억에 잠긴 듯한 모습에 아카이 또한 아이를 따라 10여 년 전의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군."

 

밝은 햇살. 푸른 하늘. 맑고 깊은 바다. 일렁이는 파도.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우리.

 

-누가 뭐래도 넌, 우리 나라가 자랑하는 명탐정의 제자잖니?

 

머리를 다독이는 따스한 손길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 그때도. 10여 년 전의 그 날도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도 다정했었다.

 

모래 위에 얹어두었던 손을 둥글게 말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주먹과 함께 꽉 쥐어진 모래 알갱이가 손톱 사이로 촘촘히 박혀 들어갔다.

 

“아카이 씨.”

 

쏴아아, 파도가 기분 좋은 화음을 만들어 내며 달려왔다가 황급히 도망갔다. 지면에 남은 하얀 거품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파도가 달려와 한입에 거품을 베어 물었다. 햇빛을 품은 바다가 일렁였다.

 

“나를 너무 다정하게 대해주지 말아요.”

 

뚝. 머리를 매만지던 손길이 멈추었다. 갈매기가 우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아직 초여름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일까, 그들 주위에는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파도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둘 사이를 메우려 노력했지만, 그것조차도 불가했다.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선이 느껴졌다. 틀림없이, 녹안은 작은 떨림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이치는 오직 정면만을, 끊임없이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파도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긴 침묵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저 딱 한 마디의 말을 내뱉었을 뿐인데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이가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보답해 줄 수 없을지 몰라요.”

 

아무리 목을 가다듬어도, 갈라짐은 그대로였고 그 안의 떨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계속 말을 반복하며 얼버무리는 아이의 모습에 아카이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 정도 물기가 사라진 머리칼이 사르륵 손에 감기었다. 여전히 다정한 손길에 신이치가 움찔, 몸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벽안이 잘게 흔들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녹안은, 저 사람은. 아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사람은, 정말이지-

 

다정한 사람이구나.

 

분명, 지금 자신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엉망일 것이다. 신이치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머리를 간질이던 손길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신이치.”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전신을 휘감았다. 볼을 부드럽게 감싼 손이 이끄는 대로 다시 시선이 올라갔다. 두 눈동자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던 녹안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진심을 담았다.

 

“괜찮아.”

 

한 마디의 짧은 말.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신이치는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울컥,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에 신이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랫입술을 더 강하게 깨물었다. 상처가 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인지, 입술을 매만지며 제지하는 그의 모습에 어딘가 고장이 난 것처럼 맥박이 잔물결을 일으켰다.

 

“…내가.”

 

신이치가 크게 숨을 마시고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천천히 10을 센 아이가 다시 눈을 뜨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원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대답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 자신을 담고 있는 그의 눈은 여전히 이렇게나 다정하니까. 아이가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은 감정을 꾹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아카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자그마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쪽이야말로.”

 

신이치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음속을 가득 메운 채 사고를 막던 복잡한 감정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무언가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진 기분이었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보며 둘 사이를 메우려 했으나, 이번에도 불가했다. 둘 사이에는 이미, 맑은 웃음소리가 그 자리를 잔뜩 차지하고 있었기에.

 

뜨겁지만 밝은 햇살이 그들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초여름 날. 하얀 파도와 맑은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던 어느 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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