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신-숨결
지독한 장마였다. 차갑게 쏟아지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 감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책상 어느 구석에 놓인 사진이 보였다. 그 어렴풋이 보이는 형태가, 누군지 훤히 알 것 같아서 입술을 물었다. 다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속 무언가가 술렁였다.
미련 없이 핸드폰에 있던 사진은 전부 지워버리고, 인화된 사진은 전부 태워버리고 나서 단 하나 남은 사진이었다. 사진의 날씨는 지금과 달리 너와 함께 해변을 갔을 때. 여느 때처럼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쨍쨍히 내려 찌는 햇빛 아래 나름 멋을 낸다며 밀짚모자를 쓰고, 하와이에서 사 왔을 법한 꽃무늬 셔츠를 입은 너는 누구보다 예쁘게 웃고 있었다. 키드 특유의 입꼬리를 올리는 샤프한 웃음이 아니었다. 온연한 쿠로바 카이토의 웃음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쁨이 차오르는, 보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웃음. 태양 같았던 웃음을 보지 못한지 3년이 지났다.
힘을 줘서 그런지 사진 끝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아직도 네가 이별 선고를 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항상 그렇게, 예쁘게 웃어놓고 서는. 해변에 별이 박힌 시간에, 보름달이 환하게 피던 시간에 나를 부서뜨렸다. 네 손으로 나를 잡았고 네 손으로 나를 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매듭을 지었다. 너를 따라가기만 했다. 너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어째서 3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가슴 속에 박힌 너를 꺼내 들었는지 모르겠다. 너와 시간을 보낼 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독한 오만이었는지도 모르고.
너를 3년 후에서야 진정으로 놓아주려고 한다. 우리의 흔적이 담긴 그러나 네가 나를 지워버린 해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비를 뚫고 조금 걸어가서야 텅 비어있는 해변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젖은 모래사장에 발을 놓았다.
철퍽, 하고 거칠게 춤추는 바다는 결코 어느 선을 넘기지 않았다. 괴도와 탐정으로 만나, 사람 대 사람으로, 연인으로, 그리고 마침내 숨결이 닿았을 때. 너는 완벽히 나를 버렸다. 네가 내게 사랑 고백을 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회피하려만 했고 네가 내게 이별 선고를 했을 때 나는 너를 지우려 했다.
사람은 지독히 이기적이라고 남들 앞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는 냉정한 사람이라 속삭였다. 헤어지고 난 뒤에 너와의 추억을 없애고, 미련 없이 추리를 하며 살았다. 궁금한 건 쫓아가고, 파헤치고, 붙잡았다. 그렇게 자신을 몰아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말했다. 난 사랑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그 최면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를 향한 최면은 한없이 흐려져만 가고 지친 몸에 쌓인 탐정 일을 모두 풀어냈을 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완벽한 공허였다. 너는 더이상 없었다. 네가 이별을 말할 때 알았어야 했다. 너 없이 살아간다면 저는 오만 덩아리에, 자기 말만 하는 자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되었을 것을, 사건에 덮인 피 냄새만 맡고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너를 잡아야 했다는 것을. 너는 좋은 라이벌이었고, 사랑을 속삭인 사람이었고, 긴장을 주는 사람이었고, 짜릿한 감정을 준 사람이었다. 너를 좀도둑이라 불렀어도 내심 놀라곤 했다. 나는 단지 문제를 풀기만 하면 그만이었지만 너는 그를 만들어야 했다. 은연중에 너를 인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탐정으로서도, 연인으로서도.
네가 사귀자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 보았을 때 어쩌면 시작하지도 않은 관계였다. 자연스레 서로를 찾고, 괴도와 탐정이란 관계의 짜릿함에 매달려 입을 맞추고, 몸을 섞고, 네가 주는 따뜻함에 몸을 웅크리고 있기만 했다. 계속 너는 나를 좋아할 것 같아서, 사랑해 줄 것 같아서.
이제서야 고백한다. 널 좋아해. 3년이나 걸렸다. 널 향한 감정은 시리고, 아프고, 눈물 나면서도 널 생각하면 행복하다. 네가 나에게 이별을 말하던 얼굴과 나를 향해 행복하게 웃던 얼굴이 교차한다. 지금에서야 네가 나를 사랑했고, 나를 아껴주었고 나만 바라보았다는 걸 깨닫고야 만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일 다 팽개치고 달려오던 네가 아직도 선하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마술사였고, 항상 나를 초대해 내 눈앞에서 나를 향해 마술을 선보였는데도,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 느꼈다. 아, 멍청한 자식.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손에 힘이 풀렸다. 손에 들려있던 손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머리가 젖고, 어깨가 젖고, 팔이 젖고, 다리가 젖었다. 그리고 표정마저도. 앞이 흐렸고 눈물과 비가 섞여서 얼굴을 적셨다. 목이 턱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 놓아 울어버리고 싶은데, 널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너를 붙잡고 말하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가 제 눈물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언제였지? 지독한 허탈감이 가슴을 강타했다. 네가 없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같았다. 나는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에게 나는 부응하지 않았다. 그 사랑을 받으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잔인한 짓을 해버렸다. 너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입술도, 몸도, 같이 함께할 공간도 허락하면서 사랑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잔인했다. 네가 나에게 같은 짓을 했다면 분명 견디지 못했을 터다. 너였기에 그 만큼이나 곁에 있었고, 그만큼 익숙하게 지켜봐 왔기에 그 시간 동안 견뎠을지도 몰랐다. 미안해. 너의 심장에 칼을 박았다. 내게 고백했을 때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내 대답을 듣고 나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손을 잡는 것 하나도 내게 물어보며 다가왔던 너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며 얼마나 설렜을까.
사람은 지친다. 너도 그러했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처럼 너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끝없이 기대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 웃음에 햇살이 아닌 눈물이 담겨있었다는 걸 왜 진작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미안해, 미안해. 나는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네가 이 순간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 그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왜 비를 맞고 있는 거야?"
우산도 있으면서. 걱정이 담긴 목소리는 익숙했다. 너였다. 듣자마자 눈물이 나서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하고 싶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너와 눈을 맞추었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카이토.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진처럼 예쁘게 웃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울어버려서 눈이 새빨갛겠지만, 네 앞에서 웃는 것이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좋아해, 카이토."
네가 지쳤다는 걸 눈치 못 채서 미안해. 이제야 알아채서 미안해. 3년 동안이나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아직도 나를 좋아할 거라는 건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내 마음을 너에게 전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나를 잠깐이나마 좋아해 주었던 사람아, 이제서야 당신에게 나도 알지 못했던, 뒤늦게야 알아챈 마음을 전한다.
"…진심이야?"
흐릿한 눈은 카이토의 표정을 보여주길 거부한다. 분명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차갑게 식어있을 것이다. 어둡게 내려앉은 바다와 달리 터질 것 같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우산 아래여서 그런가 쏟아지는 빗무리 사이에서 네 숨결과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너에게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내 할 말만 전하고 뒤를 도는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이다. 어차피 너는 나를 잊었을 것이다. 기억한다면, 뒤늦게야 이야기를 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기억해주길 바라.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는 찰나 뒤에서 허리가 붙잡혔다. 등 뒤로 카이토의 온기와 어깨에 머리를 박은 것이 느껴졌다. 옷이 젖는다며 밀어내려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몸을 비틀고 있을 때 귓가에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젠장, 신이치, 나도, 나도. 눈물에 가득 찬 목소리에 절로 몸을 멈추었다.
"널, 아직도 좋아해. 3년이나 지나서 이야기하는 너도, 비오는 날 울면서 고백하는 너도, 다 좋아해, 전부 좋아해."
내가 무엇 때문에 이 해변에 다시 왔는데. 부서지도록 껴안는 카이토의 손길 사이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더욱 눈물이 났다. 미안해, 고마워.
그 후로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전부 닿을 때까지, 우리의 눈물이 마를 때 까지, 비가 멈출 때까지. 한참을.

